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잉글랜드 왕국 (문단 편집) === [[플랜태저넷 왕조]] === 노르만 왕조의 [[헨리 1세]]는 하나뿐인 적자인 아들 윌리엄이 죽자 유일한 적장녀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5세의 황후인 [[마틸다(잉글랜드)|마틸다]]를 여왕으로 즉위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잉글랜드에는 여왕이 없었기에 다른 왕족이나 귀족이 반발할 가능성이 컸고 헨리 1세도 그걸 우려해서 자신의 생전에 귀족들에게 마틸다에 대해 충성 서약을 시켰다. 여기에는 스티븐 역시 포함되어 있었으나 헨리 1세가 사망하고 앙주 백작과 재혼한 마틸다가 국외에 있을 때를 틈타 [[스티븐 왕|스티븐]]이 그냥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해버렸다. 왕위를 찬탈당한 마틸다 공주는 남편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의 군사를 빌려 이복 형제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와 손잡고 [[내전]]을 개시했다. 사촌 간의 내전으로 잉글랜드 국내는 봉건 영주인 힘있는 가신들이 힘의 공백을 틈타 분열되고 [[스코틀랜드 왕국|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침공까지 받았다. 이후 1153년 1월부터는 어머니 마틸다를 돕기 위해 아들 헨리가 군을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해 전쟁이 재개되었다. 내전이 계속되던 중 스티븐은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했던 아들 외스타슈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헨리와 윌링포드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조약 내용은 스티븐의 왕위 승계는 인정하되 마틸다의 아들 헨리를 공동왕으로 삼아 다음 왕좌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스티븐은 켄트 주의 도버에서 사망했고 윌링포드 조약에 따라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헨리]]가 단독 통치자로서 즉위해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헨리 2세는 앙주 백작의 직위를 물려받고 아키텐 공작령의 상속녀 아키텐의 엘레아노르와 결혼함으로서 프랑스 왕국 내에 막대한 봉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 왕에 오르자 헨리 플랜태저넷의 영지 역시 잉글랜드 왕실의 영지로 포함되면서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내부에 막대한 영토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로서 명목상 프랑스 왕의 신하였던 잉글랜드 왕이 가진 영토가 프랑스와 맞먹을 수준이 되었다. [[리처드 1세]] 시기에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맹활약했으나 결국 성지 탈환에 실패한데다가 내정도 어려워졌다. 그 다음 왕이었던 [[존 왕]]은 '''결지왕, 실지왕, 무영토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프랑스 왕국 내 플랜태저넷의 영지를 대부분 상실한다. 이런 존 왕의 실정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존 왕을 협박해 [[마그나 카르타]](대헌장)를 받아냈다. 이후 [[에드워드 1세]] 시기에는 의회가 최초로 소집되고 웨일스를 복속시켰다.[* 이미 웨일스는 잉글랜드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명목상의 복속에 불과했고 사실상 웨일스 유력자들의 자치가 이루어졌다. 이들을 실질적으로 복속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스코트인들의 망치라는 별명답게 스코틀랜드도 정복해 잉글랜드 왕인 그가 스코틀랜드 왕까지 겸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는 [[로버트 1세]]에게 패배해 결국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다. [[에드워드 3세]] 시기가 되면 플랜태저넷이 가진 프랑스 내 잔존 영토에 대한 지배권과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 등이 겹쳐 [[백년 전쟁]]이 일어났다. 초반에는 장궁을 앞세워 승리를 거듭했지만 [[잔 다르크]]를 앞세운 프랑스의 반격에 밀려나 [[칼레]]를 제외한 모든 대륙 영토를 상실하고 쫓겨난다. 백년전쟁이 끝나고 2년 후인 1455년 [[장미전쟁]]으로 불리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파인 랭케스터와 요크의 대결이 30년간 벌어졌고 결국 [[헨리 튜더]]가 왕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